대법원이 8월 12일 일본제철에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배상 8000만원을 확정하며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멸시효 취지를 그대로 이어갔다. 일본 정부가 배상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어, 회복 국면에 들어선 한일관계에 다시 부담 요인이 얹혔다. 제3자 변제 해법이 유지될지, 향후 남은 유사 소송이 어떻게 이어질지가 이번 판결이 남긴 확인 지점이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8월 12일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의 상고를 기각하고, 강제동원 피해자 고 민문식씨 유족 5명에게 8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유족은 2019년 4월 1억원을 청구하며 소송을 냈다.
민씨는 1942년 2월부터 7월까지 일본 이와테현의 일본제철 가마이시 제철소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고, 1945년 귀국해 1989년 세상을 떠났다. 피해 당사자가 이미 숨진 뒤 유족이 이어받은 소송이라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강제동원 배상 문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Photo by Red Shuheart on Unsplash
이 사건에서 다툰 핵심은 일본제철의 배상 책임 자체가 아니었다. 그 책임은 이미 앞선 판례로 정리돼 있었다. 진짜 쟁점은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였다.
1심은 시효가 지났다며 피해자 측이 사실상 졌다. 그러나 2심은 2024년 8월 1일 원심을 파기하고 8000만원을 인정했다. 시효의 기산점을 2012년이 아니라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일로 봐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2018년 선고로 비로소 사법적 구제 가능성이 확실해졌으니, 그때부터 시효를 따져야 한다는 논리다. 대법원은 이 판단에 법리 오해가 없다고 보고 그대로 확정했다.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분기점이었다. 이후 대법원은 유사 소송에서 피해자와 유족의 손을 들어주는 흐름을 이어왔다.
이번 판결은 그 흐름을 시효 문제에서 재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해도 시효가 지났다며 청구를 막으면 실제 구제는 어려워진다. 대법원이 기산점을 2018년으로 잡아준 것은, 아직 소송을 마치지 못한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구제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신호로 읽힌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이 자국 기업에 배상을 명령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해 왔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것이 일본 측의 오랜 논리다.
여기서 확정판결과 실제 배상 사이의 간극이 생긴다. 한국 법원이 배상을 명령해도, 일본 기업이 한국 내 자산으로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집행 절차가 뒤따르고, 그때마다 외교 마찰이 커진다. 판결이 곧바로 피해자 손에 배상금을 쥐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일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라는 점이 부담을 키운다. 정부는 그동안 피해자에게 우선 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식으로 마찰을 관리해 왔다. 하지만 피해자 일부와 야당은 이를 굴욕적 해법이라며 철회를 요구하고 있어, 국내에서도 합의가 완전히 이뤄진 상태는 아니다.
정리하면 이번 판결은 사법부가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사건이지, 새 국면을 연 사건은 아니다. 다만 확정판결이 쌓일수록 배상 실현 요구와 일본의 거부가 부딪치는 지점도 늘어난다. 남은 유사 소송의 진행과 정부의 제3자 변제 유지 여부가, 앞으로 한일 외교 협의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