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9월 일본 요코하마에 첨단 패키징 연구거점 APL을 열고 현지 소재·장비 기업과 공동연구에 나섰으며, 이재용 회장도 같은 시기 일본 정·재계와 접촉했다. 첨단 패키징의 핵심 소재인 ABF가 일본에 98%가량 쏠려 있어 AI 반도체 양산 경쟁력이 일본 공급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ABF 수급과 가격, APL 공동연구 성과, 2019년 같은 수출규제 재발 여부를 지켜보면 한일 반도체 협력의 향방이 보인다.

삼성전자는 9월 8일 일본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에 '어드밴스드 패키지 랩(APL)'을 열었다. 이곳에서 현지 소재·부품·장비 기업들과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을 함께 연구한다. 이재용 회장은 같은 시기 당초 일정에 없던 일본 참의원 대표단과의 오찬에 참석해 반도체 사업 전망과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식 발표로 목적이 공개된 건 아니다. 다만 연구소 개소와 정·재계 접촉이 겹친 흐름을 보면 방문의 축이 어디에 있는지는 읽힌다. 일본의 소재·장비 공급망이다.

Andrey Matveev
반도체 성능을 끌어올리는 길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회로를 더 미세하게 그리는 전공정, 다른 하나는 완성된 칩 여러 개를 효율적으로 쌓고 잇는 후공정이다. 미세공정이 물리적 한계에 다가서면서, 칩을 하나처럼 묶어 성능을 끌어내는 첨단 패키징이 새 승부처로 떠올랐다.
특히 AI 반도체가 이 기술에 기댄다. 연산 칩과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한 패키지 안에 촘촘히 붙여야 데이터가 빠르게 오간다. 패키징 기술이 곧 AI 가속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셈이다. 삼성이 일본에 전용 연구소를 세운 배경도 여기에 있다.
첨단 패키징은 일본 소재 없이는 돌아가기 어렵다. 대표적인 것이 ABF(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다. 반도체 기판의 절연층에 쓰이는 이 필름은 일본 아지노모토가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생산도 일본에 쏠려 있다. 한 분석은 ABF의 약 98%가 일본 안에서 생산된다고 집계했다.
쏠림은 공급 불안으로 이어진다. 아지노모토는 2026년 신규 설비가 돌기 전까지 약 20%의 수급 격차가 이어질 것으로 봤고, 기판 패널의 리드타임은 35주를 넘기며 현물 가격은 계약가 대비 최대 25% 비싸진 것으로 전해진다.
장비 쪽도 사정이 비슷하다. 레이저 드릴링, 적층·프레스, 검사(AOI) 같은 패키징 전용 장비의 상당수를 일본과 대만 기업에 의존한다. 기판 제조에서도 일본의 이비덴, 신코덴키 같은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은 메모리와 칩 설계에서 앞서 있지만, 이 소재·장비 영역만큼은 일본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결국 AI 반도체를 아무리 잘 설계해도 받쳐줄 소재와 장비가 없으면 양산이 막힌다. 삼성이 현지에 연구소를 두고 일본 기업과 손잡는 것은 그 공백을 메우려는 포석에 가깝고, 이재용의 일본행 역시 단순한 외교 일정으로 보기 어렵다.
협력이 실제로 깊어지는지 가늠하려면 몇 가지를 보면 된다.
세 지표가 맞물려 돌아가면 한일 반도체 협력은 탄탄해지고, 어느 하나가 삐끗하면 공급망 전체가 흔들린다. 첨단 패키징을 둘러싼 한일 관계는 선언이 아니라 공동연구 성과와 소재 수급이라는 숫자로 따라가야 윤곽이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