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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3년 중국 총리를 지낸 주룽지가 8월 12일 베이징에서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그는 국유기업 구조조정과 2001년 WTO 가입을 밀어붙여 중국을 세계 경제에 편입시킨 개혁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남긴 수출 주도 고성장의 유산은 오늘의 한중 교역 구조와 미중 무역 갈등을 읽는 배경이 된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 총리를 지낸 주룽지가 8월 12일 오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신화통신은 별세 사실을 전하면서 구체적인 병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덩샤오핑이 제시한 개혁·개방의 방향을 실제 제도로 옮긴 사람'이다. 오늘날 세계 2위 경제권이 된 중국의 출발선에 그의 두 가지 결정이 있다. 국유기업 구조조정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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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룽지가 총리로 일한 시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주변국을 덮쳤고, 그 직전 중국은 두 자릿수 물가 상승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 조건에서 그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국유기업 개혁에 손을 댔다.
개혁은 성과와 비용을 동시에 남겼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그의 재임 기간 중국은 연평균 8% 안팎의 성장세를 유지했다. 반대로 국유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하는 등 상당한 사회적 비용도 뒤따랐다. 성장의 방향을 튼 결정이었지만, 그 청구서는 노동자들이 나눠 졌다.
주룽지 유산의 핵심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이다. 중국은 그해 12월 정식 회원국이 되며 세계 경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됐고, 그는 그 협상을 지휘한 핵심 설계자였다.
이 결정의 무게는 지금 돌아볼 때 더 분명해진다. WTO 가입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고, 값싼 제조업 수출을 발판으로 고성장 궤도에 올랐다. 관세 인하와 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안정적인 수출 시장을 확보한 거래였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 갈등도 따지고 보면 그때 세계 무역 질서 안으로 들어온 중국이 너무 커진 데서 비롯된 면이 있다.
주룽지는 정책만큼이나 화법으로도 기억된다. 1998년 총리 취임 당시 그는 부패 공무원을 겨냥해 "관 100개를 준비하라, 그중 하나는 내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강한 추진력과 직설적 어법 탓에 '경제 차르',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이런 스타일은 평가를 갈랐다. 과감함이 개혁 속도를 냈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강한 하향식 방식이 사회적 충격을 키웠다는 비판도 있다.
한국 독자에게 주룽지의 유산은 남의 나라 역사만은 아니다. 그가 열어젖힌 중국의 고성장과 세계 무역 편입은 이후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 된 중국과의 관계를 떠받치는 토대가 됐다. 그는 2000년 10월 한국을 국빈방문해 양국 협력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지금의 한중 교역 구조, 즉 중간재를 팔고 완제품 시장에서 경쟁하는 관계는 WTO 이후 중국이 제조 강국으로 큰 결과 위에 서 있다. 주룽지 시대를 이해하는 일이 오늘의 한중 관계를 읽는 배경이 되는 이유다.
판단을 덧붙이자면, 그의 개혁은 '성장을 위해 무엇을 감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통과한 사례다. 지금 중국이 마주한 과잉 생산과 내수 부진이라는 숙제도 그때 택한 수출 주도 성장의 그늘이라는 점에서, 그의 유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