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9일 KB증권 컨퍼런스에서 한국은 더 이상 대외 채무국이 아니라며 환율 레벨에 패닉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근거는 받을 외화가 갚을 외화보다 많은 순대외채권국 지위로, 원화가 약해지면 해외 자산의 원화 가치가 오히려 커진다는 논리다. 다만 나라 전체의 안전이 개별 기업·가계의 물가 부담까지 없애주는 것은 아니어서, 순대외채권과 단기외채 같은 지표를 함께 봐야 한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9월 9일 서울 여의도 KB증권 코리아 컨퍼런스 특별 대담에 나섰다. 4월 임기를 마친 뒤 다섯 달 만의 공식 석상이었다. 그는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비상근 선임연구위원으로도 자리를 옮긴 상태다.
이 자리에서 나온 말이 "한국은 더 이상 대외 채무국이 아니다"였다. 이어 "환율이 특정 레벨을 넘어선다고 해서 패닉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며 "외환위기 트라우마는 이제 잊어야 한다"고 했다. 환율이 오를 때마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위기감을 정면으로 겨냥한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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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대외 채무국이 아니라는 대목이다. 나라 단위로 외국에 갚아야 할 확정된 외화 빚(대외채무)과 외국에서 받을 확정된 외화 채권(대외채권)을 견줬을 때, 받을 것이 갚을 것보다 많은 상태를 순대외채권국이라고 부른다.
숫자로 보면 이렇다. e-나라지표 기준 2025년 말 한국의 대외채무는 7,702억 달러다. 전년 말 6,778억 달러에서 924억 달러 늘긴 했다. 그런데 외국에 빌려주거나 받을 대외채권은 이를 웃돌아, 순대외채권은 3,000억 달러대의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갚을 빚보다 받을 돈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본질은 갚아야 할 단기 외화 빚은 쌓여 있는데 손에 쥔 달러가 말라버린 상황이었다. 지금 구조는 그 반대에 가깝다.
순채권국의 이점은 환율이 오를 때 오히려 드러난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환율 상승) 국내 투자자가 들고 있는 해외 자산의 원화 환산 가치는 커진다. 이 전 총재가 "환율이 오르면 해외 자산을 보유한 국내 투자자는 평가이익을 얻는다"고 설명한 이유다.
진단도 함께 내놨다. 원화 움직임이 이제 무역수지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 유출입 같은 금융 흐름에 좌우되는, 선진국형 구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환율 숫자 하나를 국가 위기의 신호로 읽던 시절의 문법이 더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기서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나라 전체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과 '개인에게 부담이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순채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묶어 계산한 결과이고, 외화 빚이 많은 개별 기업이나 원자재를 수입하는 업종에는 여전히 환율 상승이 압박으로 작용한다.
이 전 총재 본인도 재임 중이던 2025년 12월에는 당시 환율을 두고 "금융위기는 아니지만 물가와 양극화 측면의 위기"라고 짚은 바 있다. 환율 급등은 수입물가를 밀어 올려 장바구니 물가로 번진다. 붕괴의 공포와 생활물가의 부담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뜻이다.
'환율 몇 원 돌파'라는 헤드라인 하나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대외 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를 곁들여 보는 편이 낫다.
| 지표 | 무엇을 보나 |
|---|---|
| 순대외채권 | 나라 전체가 받을 외화가 갚을 외화보다 많은지 |
|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 당장 갚을 단기 빚을 방어할 여력이 되는지 |
| 외국인 증권 자금 유출입 | 환율을 실제로 움직이는 자본 흐름의 방향 |
이 지표들이 안정적인데 환율만 오른다면, 그것은 붕괴의 신호라기보다 자본 흐름에 따른 가격 변동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단기외채가 불어나고 외국인 자금이 급격히 빠진다면 그때는 숫자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