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노벨평화상은 전 유엔 인권최고대표이자 전 ICC 재판관인 남아공 법조인 나비 필라이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가 국제법과 전쟁범죄 단죄의 가치를 기린 반면, 미국은 같은 ICC를 겨냥해 제재를 이어가고 있어 두 흐름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수상 소식과 제재 논란은 별개의 사건인 만큼, 필라이 개인의 공로와 미국·국제사법기구의 갈등을 나눠 읽어야 한다.
2026년 노벨평화상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법조인 나바네템 '나비' 필라이(85)에게 돌아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0월 9일 발표에서 평화와 국제법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들었다.
필라이는 평생을 국제 형사사법의 현장에서 보낸 인물이다. 르완다 집단학살을 다룬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 재판관을 지냈고, 2008년부터 2014년까지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맡았다.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법정에 세우는 일이 그의 경력을 관통하는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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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이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인연은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ICC 재판관으로 일했다. 노벨위원회는 전쟁범죄와 제노사이드가 반드시 기소되도록 만드는 데 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름이 최근 다시 주목받은 것은 가자지구 때문이다. 필라이는 유엔 인권이사회가 2021년 만든 점령지 팔레스타인 조사위원회를 이끌며 이스라엘의 가자 작전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결론을 냈다. 이스라엘은 이번 수상을 두고 "반이스라엘 증오를 정당화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노벨위원회는 상이 제노사이드 판단에 대한 입장 표명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미국과 ICC의 충돌은 이스라엘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에서 비롯됐다. ICC는 2024년 11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2월 행정명령 14203호에 서명해 이에 맞섰다. 이 명령을 근거로 미 국무부는 ICC 검사장과 재판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담당 유엔 특별보고관에게 제재를 부과했다. 제재에는 미국 내 자산 동결, 금융거래 차단, 입국 거부가 포함된다.
이것이 긴장을 키우는 이유는 제재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국제사법기구의 기능 자체이기 때문이다. 재판관과 검사가 미국 금융망에서 배제되면 재판소 운영 전반이 위축된다. 이런 방식은 2020년 트럼프 1기 때 당시 ICC 검사장 벤수다를 제재한 전례가 있고, 그때는 바이든 행정부가 취소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필라이의 수상 소식과 미국의 ICC 압박은 같은 시점에 포개졌다. 한 미국 언론은 필라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날, 미국이 그가 몸담았던 재판소를 무력화하려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전했다.
주의할 점은 필라이 본인이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오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이 제재한 대상은 ICC 관료들과 유엔 특별보고관이었다. 다만 필라이가 이끌던 조사위원회 위원 세 명은 2025년 7월 나란히 사임했다. 필라이는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들었고, 위원들은 외부 압력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미국이 특별보고관을 제재한 직후였다는 점에서 해석의 여지가 남았다.
이 사안을 읽을 때는 두 개의 축을 섞지 않는 편이 정확하다.
하나는 필라이 개인에 대한 평가다. 수십 년간 국제 형사사법에 헌신한 법조인에게 노벨위원회가 상을 준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와 국제기구의 제도적 갈등이다. 이스라엘 지도부 기소를 둘러싼 미국의 ICC 제재는 필라이 수상과 별개로 진행돼 온 외교·법률 분쟁이다.
두 축이 지금 한 인물과 한 재판소를 매개로 겹쳐 보일 뿐, 원인과 책임의 주체는 다르다. 수상을 제재에 대한 반격으로, 혹은 제재를 수상에 대한 보복으로 단순화하면 사안의 실제 구조를 놓치게 된다.